본문 바로가기

소설

(77)
유리창 너머의 봄 - 16화: 폭풍 전야 문틈으로 스며든 어두운 실루엣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낡은 나무문이 삐걱거리며 열릴 때, 그녀의 손끝이 허공에서 주춤거렸다. 피아노 위에 얹어둔 손이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했다. 해림의 시선은 문 앞으로 쏠렸고, 들어서는 사람의 얼굴에 닿았다.“하준?” 해림이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렸다. 하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당황스러움과는 다른 감정이 차올랐다.지하준은 천천히 해림 앞으로 다가오며 말없이 머뭇거렸다. 그의 손에는 해림이 어릴 적 쓰던 낡은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그것이 품에서 보일 때마다 해림은 무언가가 목구멍으로부터 밀려 올라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하준은 그녀의 염려를 읽었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랑 얘기해야 해.”“지금은...
유리창 너머의 봄 - 15화: 서영의 의심 윤해림은 낡은 건물의 문턱에서 얼어붙었다. 문이 열리며 흘러나온 피아노 소리는 감미롭지만 어딘가 불완전했다. 음 하나하나가 의도치 않은 흔들림을 품고 있었다. 해림은 그 소리가 마치 그녀의 불안정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의 얼굴이 조명을 받으며 선명해졌다. 지하준이었다. 그의 눈빛은 피곤한 듯 부드러웠고, 손에 든 종이봉투는 바닥에 부드럽게 내려놓은 것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다.“들어올래?” 하준은 해림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갔다.해림은 대답 대신 무겁게 다리를 움직였다. 문턱을 넘자마자 곡선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계단이 나타났다. 하준은 익숙한 듯 발걸음을 옮겼고, 해림은 그의 뒷모습을 따라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철제 난간은 차갑..
유리창 너머의 봄 - 14화: 흔들리는 마음 하준의 목소리는 낮고 분명했다.“해림아, 네가 몰랐던 이야기가 있어.”햇볕이 부서지던 카페 창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 셋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전혀 다른 온도였다. 도윤은 하준의 말을 자르지 않고 기다렸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미 매섭게 움직이고 있었다. “과거의 이야기”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고 있었다.해림은 마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하준을 보았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인 도자기 컵을 가만히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또 뭔가를 꺼내려 하네, 하준. 이번엔 차마 도망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얘기겠지.’하준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그의 ..
유리창 너머의 봄 - 13화: 지하준의 고백 해림의 손끝이 스케치북 가장자리를 쓸고 지나갔다. 그저 집에 틀어박혀 머리를 감싸쥐고 싶었던 순간, 도윤이 준 크레용을 떠올리며 밖으로 나선 것이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랐다. 그는 언제나 예고 없이 나타났다. 꼭 흐릿한 봄 안갯속에서 불쑥 걸어 나오는 사람처럼.“그럼 해림 씨는 왜 여기 있나요?”도윤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스쳤다. 그의 손은 바지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고, 한 쪽 어깨는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지만, 조금은 신중한 태도로 거리를 유지하는 모습이었다.해림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그냥… 생각 좀 하려고요. 여기 있으면 편하거든요.”그녀의 말이 끝나자 둘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도윤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마치 오래된 필름을 천천히 되감듯 고개를..
유리창 너머의 봄 - 12화: 다시 그리기 시작하다 공원에는 어슴푸레한 가로등 빛이 떨어져 있었다. 밤공기가 차가운 듯 부드럽게 해림의 뺨을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린 스케치북의 표지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표지에 남은 오래된 흔적들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그 조그만 감촉조차 그녀의 심장을 두드리는 듯 아릿했다.도윤은 그녀의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말없이, 그러나 그 자리에서 결코 물러설 기미가 없는 태도였다. 그의 시선은 해림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해림은 여전히 스케치북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얇은 표지를 넘길까 말까 고민하는 그녀의 손가락은 긴장감으로 약간 떨렸다. 해림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표지를 조심스럽게 열었다.처음으로 보인 것은 비어 있는 습작 종이였다. 하얗고 거친 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풀어지지 않은 실타래 같았던 과거의 기억이 하나..
유리창 너머의 봄 - 11화: 번지는 그림자 밤은 더욱 깊어지고, 서울의 거리에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해림은 병원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할머니의 병실 문 앞에 서서, 그녀는 한 번 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모든 것이 가라앉은 듯 고요한 공간. 병실 안에서는 기계가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림은 마치 발밑에 무언가 묶여 있는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들어가야 해. 할머니가 깨어나셨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하지만 문고리에 손을 대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긴장했다. 이럴 때마다 항상 하준이 옆에 있어 주었다. 언제나 그녀를 대신해 무언가를 행동에 옮겨주었던 그.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뒤에서 발..
유리창 너머의 봄 - 10화: 서로 다른 고독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병원 앞. 해림은 심호흡을 하며 건물 입구를 바라봤다. 병원의 공기는 늘 차갑고 무거웠다. 그녀의 손은 핸드폰을 쥔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괜찮아... 이건 그냥 일시적인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그 빈곤한 위로는 단단한 벽처럼 느껴지는 병원의 기운을 뚫지 못했다.“해림!”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뒤를 돌아보니 하준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는 급하게 달려왔는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해림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하준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들어가려고?”“응.” 해림은 짧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몸은..
유리창 너머의 봄 - 8화: 지나간 봄날들 하준은 입술을 다문 채 긴장감이 맴도는 공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해림을 스치고, 다시 도윤에게로 옮겨졌다. 도윤은 한 손에 들고 있는 캔버스를 천천히 내렸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의 발소리가 묘하게 부드러웠지만, 그 발걸음이 뱀처럼 조용히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이 시간에 공원이라니. 우연이 겹치네요.” 도윤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면서도, 그의 눈은 날카로웠다. 해림의 손끝이 움찔하며 스케치북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잠시 고개를 숙였다.“그러게요.” 하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고 단호했다. “저도 여기서 도윤 씨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그 짧은 말이 칼날처럼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갈랐다. 하준의 시선은 도윤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어깨는 해..